■임란때 선조가 구봉선생님을 기용하지 못하신 이유


<<임진란때 선조대왕이 구봉선생님을 기용하지 못하신 이유>>


봉우선생님 : 일부러 구봉선생님…
 
학인들 : 앉으셔서 하시지요. 앉으시지요.
 
봉우선생님 : 구봉선생님의 경과를 말씀하든지 시실 그냥 말씀하는건 좋은데, 이거 내가 얘기하면, 내 조상하고 직접 관계되신 일부텀 좀 얘기해야겠어요.
 
학인1 : 앉아 말씀하시라고 그러세요. 
학인2 : 앉아서 이야기.. 말씀 하세요. 
 
봉우선생님 : 괜찮어 여기있어도.
 
학인2 : 에이고 다리 아프신데.
 
봉우선생님 : 괜찮어. 
  여러분께 저 이, 구봉선생님 약력, 다른건 다 아실 테니까 지가(제가) 또 할 필요 없고, 임진왜란적에.. 임진왜란적에 싸움은 당나라에서는 이여송(李如松)1)이가 나와서 했고, 여기 나와서는 의병 대장들하고 권율 도원수에 제 11대조가 했습니다.
그런데, 율곡이 돌아가실적에 임금한테 부탁하시길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앞으로, 다 이 앞일을 잘 아시는 양반들이니까, 
  “일본들이 무슨 또 침노(侵擄: 침략)할 염려가 있으니까 그렇게 침노하거든, 송아무(구봉선생님) 그 양반을 기용하시면은 불과 한 두달 석달이면 넉넉히 평정합니다.” 
  하고 이렇게 부탁을 하고 돌아가셨어요.


  그 돌아가신 뒤에 임진란이 났습니다. 임진란이 났으니까 율곡이 부탁하신 생각이 나서, 구봉선생님을 어전에 불러들이셨어요. 불러들이셨는데, 엎드리셔서 잘 일어나질 않으셔, 이 어른이. 그래 인제 일어앉으라고 그래서 일어앉은 뒤에, 이아무(이율곡)가 그대를 천(薦)해서(천거해서) 내가 그대를 부르는 거니까 그렇게 알라고 이렇게까정(이렇게까지) 말씀을 해.. 좋았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눈을 딱 감고 대답을 자꾸 하셔요, 구봉선생께서. 눈을 딱 감고 이렇게 대답을 하시니까, 선조대왕이 
  “아, 왜 그대가 눈을 감고 얘기해.. 대답을 하는가?”
“황송하옵지, 소신의 안광(眼光: 눈빛)이 다른 시람보다 조금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 혹 경동(驚動: 아주 놀람)하실까뵈(봐), 놀라실까뵈 그래서 눈을 딱 바로 뜨질 못합니다.” 고


  “아니 시람의 안광이 얼마나 되겠나. 그 눈좀 떠보게.”
  그래 첫번엔 율곡이 부탁한데로 임진란에 그 양반을 기용할라고 했던거에요. 아 그래, 눈을 뜨셨어요. 눈을 뜨시는데, 번갯불 되게 치는 번갯불만침(만큼)이나 눈이 확 뜨는데, 겁이 나셨어. 번쩍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냥. 아 그래놓고선 고만 다시는.. 다시는 들어오라고 하는 소리를 않고 그냥 끊었습니다. 그러니 선조대왕이, 이거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무리 구봉선생님 안광이 세시더라도 선생님의 안광이지 다른거 아니고, 벼락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 놀래가지고선 다시 쓰지도 못하고선 참, 선조대왕이 좀 약하셨지.


 
1) 1549~1598, 중국 명(明)의 장수로서 임진왜란 당시 명의 2차 원병(援兵)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조남명을 통해 미리 의병 대장들을 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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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신데 이 양반이, ‘좌우간 임진란이 나더래도 나는 쓰지 못할거다.’ 하는 생각으로 미리 무슨.. 뭐를 준비하셨는고 하니,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지리산의 조남명하고 친하시니까, 조남명하고 늘 만나신 자리가 어딘고 하니, 요 계룡산 수정봉이라는 뎁니다. 그러면 고때 거기 몇분이 만나는고 하니 토정[土亭, 이지함(李之?), 1517~1578], 남명, 저 서고청[徐孤靑, 서기(徐起: 1523~1591)], 이 어른 이렇게 해서 거기 오면 만나셔. 
  만나시던 자린데, 부탁을 내려 하길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 임진란이 나기 전이지만 임금이 당신 쓰지 않으려니는 아셨어요, 여러가지로 아셔서 조남명더러 
  “그대가..” 친하니까 “그대가, 앞에 시람들을 길르소.”


  정기룡(鄭起龍)2), 곽재우(郭再祐)3), 김덕령(金德齡)4), 김덕령은 직접 한게 아니고, 김덕령 선생을 가르치셨습니다. 송해광(宋海狂)5)이라고 그를 가르쳐 가지고선 “앞일에 이런 시람들을 좀 잘 길러주시오.” 해서 조남명이 학자님이지 그런거 가르치실 양반이 아닌데, 이 어른 부탁으로 세분을 양성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의병으로 싸움하는덴 그만침 하는게 아무도 없어요.
  정기룡 한분이 여 상주싸움에 딱 가서 지키니까, 여기서 내려가던 수만명이 아무개가 말타고 저기서 지킨다니까 가지 못할만침 무서워했어요. 
  누구는 저, 김덕령이는.. 김덕령이(을) 직접 가르치시진 않은거고, 김덕령이 선생.. 김덕령 선생, 해광 그 양반을 저 조남명이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조남명이 가르치는게.. 가르치시길 이 양반(구봉선생님)이 무엇, 무엇, 무엇 가르치라고 해서 가르친겁니다. 그래가지고… 8년싸움에 시람이 많이 상할까봐 될 수 있으면 덜 상하게 하느라고, 나라 임금이 쓰지 않으실줄 아시고 미리 그렇게 하시고,


 
2) 조선 중기의 무신. 1562~1622, 자 경운(景雲). 호 매헌(梅軒).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시조. 1580년(선조 13) 고성(固城)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으로 개명하였다. 임진왜란 때 거창, 금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상주성을 탈환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령에서 적장을 생포하고 성주·합천·초계·의령·경주·울산을 수복했다.
3)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1552~1617,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본관은 현풍(玄風). 경남 의령 출신. 1585년(선조 18)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십명의 시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4)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1567~1596, 자 경수(景樹). 시호 충장(忠壯). 본관 광산. 광주(光州) 출생.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시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 권율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생애와 도술을 묘시한 작자 ·연대 미상의 전기 소설《김덕령전》이 있다.
5) 송제민(宋齊(濟)民):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1549~1602, 호 해광(海狂). 자 시역(士役). 본관 신평(新平). 광주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격(性格)이 호방(豪放)하여 속박(束縛)받기를 싫어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힘썼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김천일(金千鎰)?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킴.


 
<<권율장군도 40이 넘도록 과거를 안보고 구봉선생님께 병법과 검술을 배우셨다.>>


  고 다음에 저희 11대조(권율장군)한테는, 저희 12대조[권철(權轍, 1503~1578)]가 동고(東皐) 이정승[이준경(李浚慶, 1499~1572)]하고 30년 독상(獨相)입니다. 우상(右相: 우의정), 좌상(左相: 좌의정), 영의정해서 30년 영의.. 정승으로 계실땐데, 당신이 직접 저 구봉선생님 찾지는 않으셨어요. 찾진 않으시고 몇번 만나셨어요. 만나셔가지고 부탁을 하시면서 “내 자식하나 부탁하네.” 이러니까, 연치가 있으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했는데, 끝에 아드님 5형제분에 끝에 아드님을 40이 넘도록 대과(大科)6)를 안뵜습니다. 40이 넘도록 대과를 안뵈시고 그 양반 공부를 덜해서 공부를 더 시켰다고 말들은 그럽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공부를 왜 저, 정승의 아드님이 뭘로 무슨 다른 공부를 못해서 칼공부 했겠습니까? 검술, 병서 공부 하신거여. 하시길 이 어른한테 했어요. 소문이 안나지만 다 압니다, 집안에서는. 이 어른한테 고기서 얼마 안되니까, 고향이니까 고향서 거기가 거기 시시던 데니까, 늘 댕기면서 공부를 하셨어요.
  그래 이 어른(권율장군) 8년 싸움에 도원수로 계시면서, 그 전략 가르치신 것이 많이 육 저.. 정갑산(丁甲算: 둔갑술)도 다놓구 이렇게 하셨으니까, 있었습니다.

 
6) 과거(科擧)의 문과와 무과를 소과(小科)에 상대하여 이르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