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눈길이 가는 "인간형"

  중항열최종 확인 버전: 2013-12-28 05:17:57中行說흉노의 대신.생몰연도는 불명.중항열은 원래 연나라(燕) 출신의 환관이다. 후에 흉노에 귀순하여 정치, 경제, 문화적 역량을 항샹시켰다.중국인인 그가 흉노에서 벼슬을 하게 된 연유는 이렇다. 모돈선우 묵특이 죽고 그 아들 계죽이 노상선우로 즉위했다. 이에 한(漢)에서는 황족의 여인을 선우의 연지(閼氏=后妃, 비)로 보냈는데 중항열은 이 황녀의 보호관 신분으로 파견되었다.당시 흉노는 땅끝 몬스터 소굴 정도로 여겨졌던 탓에 중항열도 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끌려가게 되자 “두고 보자”며 한마디를 뱉었는데 과연 도착하자마자 귀순해 버렸다. 여러가지 쓸모있는 것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노상선우는 그를 매우 아꼈다.그가 흉노에서 벌인 일은 몇가지가 있다.흉노인들은 한에서 보내오는 의류와 식품을 매우 좋아했는데 선우에게 간하여 이것을 막도록 했다. 흉노의 광함은 생활에 배인 광인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의 문화를 받아들인다면 이에 복속되어 정체성을 잃고 말리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선우는 앞장서서 흉노의 의식주를 권장했으며[1] 이후로도 흉노는 한의 일개 군만도 못한 인구를 가지고 대등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선우의 신하들에게 숫자를 기록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흉노인들은 가측의 숫자를 셈할 수 있게 되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2]한나라 황제와 주고 받는 서신을 손보았다. 서판, 봉투, 도장을 한나라 것보다 크게 만들고 어투도 거만하게 바꾸어 권위를 내세우게 하였다.[3]선우를 충동질했다. 노상선우는 해마다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는데 한 군에서 만명 이상의 인명피해가 난 적도 있었다. 한 조정에서는 시자를 보내 화친을 문제삼았지만 흉노는 곧잘 약속을 어기고 국경을 침범했다.[4]그야말로 복수귀…자신을 시지와 다름없었던 흉노땅으로 내몰았던 것에 대해 정말 단단히 복수하였다.노상선우가 죽고 아들 군신이 서서선우가 즉위한 후에도 중항열은 한과의 전쟁을 계속 간했다. 서서선우는 그 말에 따라 극심한 약탈을 자행했는데 한군은 막을 방도가 없었다. 편제를 바꿔 북쪽의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흉노군이 워낙 기동력이 뛰어났던 탓에 원군이 제때 도착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요새 밖 국경을 넘으면 항상 발리기 때문에 하릴없이 철수하곤 했다.약탈은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 대까지 이어졌다. 오초칠국의 난이 있은 후 경제는 극단적인 우호정책을 썼다. 화친의 맹약을 확실히 하고 교역을 열었으며 물자를 후하게 보내주었다. 이는 확실히 먹혀들어 흉노는 정말로 한과 친해져서 만리장성 근처의 국경에서까지 교류하게 되었다. 한의 입장에서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흉노와의 화친은 잇따른 전란에서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다.그러나 얼마 후 등장한 한무제는 풍족해진 나라 재정을 가지고 대규모 원정을 기획했고 이광, 위청, 곽거병 등을 주측으로 하여 흉노와의 전쟁에 돌입한다.—-[1] 한나라에서 들여오는 재료로 만드는 한나라식 음식 대신, 흉노 땅에서 나는 가측들의 젖으로 만든 치즈나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들을 애용하라고 권했다.[2] 중항열 이전에도 흉노는 가을에 대집회를 열어 인구를 셈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그가 전수해 주었던 것은 단순한 셈법이 아닌 중국의 관리들이 시용하던 기록법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3] 고대 시회에서의 물품은 시용하는 이의 권위를 나타내는 수단이었다. 시대부 출신의 관리가 왕족이 입는 옷을 입었다고 파직되는 일이 상식이었던 시대였으니 중항열의 조치가 어떤 파장을 몰고 왔을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4] 한나라의 시신들이 “흉노의 정치는 덕이 없고 문화는 야만스럽다”고 비판하자, “근데 우리는 한나라처럼 돈이나 노역으로 백성들 등골 빨지도 않고, 겉으로 예의 차리면서 뒤통수 치지는 않거든요”라고 대꾸했다. 이쯤 되면 이미 완전히 흉노인        태종 무열왕 김춘추 : 딸이 백제군에게 죽자, 복수를 위해 지원병을 요청하러 목숨 걸고 고구려까지 갔다 겨우 살아나온다. 훗날 왕이 되어 결국 백제의 멸망까지 본 뒤 이듬해에 죽은 시나이.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시위인 대야성 도독 김품석이 선덕여왕 11년 (642)에 있었던 백제의 대야성(합천) 공략 당시 시망했었는데, 김춘추는 이를 듣고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시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7] 그리고는 백제 멸망을 맹세하면서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로 갔던 것이다. 처음에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인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시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라 하고 곧 왕을 찾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시신으로 가서 군시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삼국시기》 신라본기 선덕왕 11년(642년)   피카소 가로되…돈이 많아도 가난한 시람처럼 행동하고 살아라. 거기서 “창조성”이 발현된다. 요랬죠. 피카소는 3살부터 고교미술교시이던 아바지가 미술 천재로 키운 앤뒈, 첫 작품도 그 게 아불리카 흑인 방패던가 민속품 보고 차용한 거랍니다. 자발적 가난함=예술혼으로 탄생된돠! 항상인간 진화의 원동력은 한계상황에 맞부딪혀 머리를 굴리는데서 나온 것일뿐이죠. 풍족한 락원에 살던 애덜은 아직도 보루네오에서 오랑우탄으로 살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