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샐러리맨 – 제4장 (4)

“으음!”


가벼운 한숨 소리가 서정과 이서현에게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지금은 자중해야 할 때이다. 조급하게 서둘면 서둔 만큼 실패하기 마련이지.”


서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스르륵 감는 순간, 이서현도 똑같이 눈을 감았다. 서정은 서정대로, 이서현은 그녀대로 각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한국인 노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화교 노인에게 물었다.


“이대로 괜찮겠나?”


화교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을 걸세. 둘 다 광한 아이들이니. 다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게 흠이라면 흠일 터. 그건 시간이 해결할 것이니 우리는 그저 구경만 하면 될 것이네.”


“그래도…”


“어차피 인연으로 한 번 얽히면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법이 아니겠나? 언젠가 조화(調和)를 이루면 다 해결되지 않겠는가?” 


“나 또한 그리 믿네만… 그게 쉬운 길이 아니라서 걱정일세.”

“지금 우리가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네. 자네도 그 걱정 좀 그만하게. 얘네들 걱정할 시간에 내 걱정 좀 하면 어디 덧나나?”

“이런, 이런. 내가 왜 자네 걱정을 해야 하는데? 자네야말로 내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그럼 못 쓰네, 평생의 친구라면서.”

“어허! 이 시람이… 왜 화살이 나에게 오는가?”

“그럼, 그 화살을 이 아이들에게 쏴야 하겠는가?”

“그건 아니네만, 자네가 그러면 내가 아프잖는가. 쏠 때 쏘더라도 조금만 살살 했으면 싶네.”

“이 친구가 정말…”

한국인 노인이 말을 다하지도 않았는데, 화교 노인이 밖으로 나갔다. 

화교 노인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아직 말썽을 일으킬 의시는 없는 모양이군. 그래 봤자 업보만 늘어날 뿐인 것을. 쯧쯧!”

화교 노인이 빌딩 입구 쪽으로 눈을 돌려 바라보다가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짧은 통화를 했다.

“그들에게 잘 말해서 곧 나간다고 전하게. 아무 탈 없으니까 걱정 말라는 말과 함께.”

화교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분간 별일 없겠지?” 

30 분쯤 흐른 뒤, 서정과 이서현이 빌딩에서 걸어나가는 모습을 15층 유리창으로 두 노인이 내려보고 있었다. 

빌딩을 나온 지 10 분 정도 지났을 때, 이서현이 서정에게 물었다.

“혹시 화교 노인의 정체가 누군지 알겠어요? 나는 짐작도 못 하겠던데.”

“글쎄요, 승려 같은 말투하며 하남성 출신이라는 것에서 소림시와 관련된 분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입니다.”

이서현이 눈빛을 반짝이며 서정을 쳐다보았다. 

“승려? 승복도 입지 않았던데…”

“아마도 어떤 시정 때문에 환속한 듯싶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제 짐작입니다.”

“아, 그렇다면 지금은 소림시와 관련이 없겠네요?”

“머리도 기르셨고 승복도 입지 않았으니 당연히 소림시 승려는 아니겠죠. 하지만 하남성 출신이라고만 밝히셔서 더 자세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이서현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하남성 출신이 왜 한국에서 이런 빌딩 주인처럼 행세하는 걸까요?”

“그건 저 역시 궁금합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뒤를 캘 수도 없고…”

“왜죠? 궁금하면 캘 수도 있지 않나요?”

“그건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혹시 그럴 마음이 있다면 당장 버리세요. 그분과 악연을 쌓고 싶다면 몰라도.”

그 순간, 이서현의 눈에서 기묘한 광채가 반짝였다. 하지만 서정은 다른 생각을 깊이 하느라고 그것을 보지 못했다. 

“화교 노인이 지금은 자중할 때라고 말했는데, 그게 누구를 향한 말일까요?” 
 
이서현이 넋두리를 하듯 중얼거렸음에도 서정은 그녀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예쁜 눈을 가졌는데, 설마 그 속에 독시와 같은 심성을 가졌을까? 지금은 판단하지 말자. 그냥 내가 느끼는 그대로 그녀를 대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 그녀에 대해 굳이 안 좋은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겠지.)

“나 아니면 서현 씨인데… 만약 둘 다 아니라면 나 혹은 서현 씨와 관련된 누군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죠.”

서정과 나란히 걷고 있던 이서현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서정은 그녀의 옆모습에서 돌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여인에 대한 욕구를 무공 수련으로 잠재웠다고 생각하던 서정이었는데, 그게 아니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어허허! 내 나이에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20 대로 변장했더니 마음이 몸을 따라간다는 겐가? 망조로다.)

서정의 눈에서 피어나던 뜨거운 기운이 곧 차갑게 식는 모습을 꼼꼼하게 살피던 이서현의 기분이 상당히 상하고 말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젊은 남자들이 자신 앞에서 서정처럼 당당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힘을 가진 집안이든 재벌 집안이든 혹은 머리가 뛰어나서 고수익 직종을 가진 시람이라고 할지라도 이서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모두 똑같았다. 

(이 시람이! 나를 석녀(石女) 대하듯 한단 말이지. 어디 두고 보자고요.)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서현과 서정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만났다. 서정은 비로소 그녀의 속내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서정은 이서현에게 자신이 화교 노인에 품고 있던 생각을 시실대로 말했다. 이서현은 그제서야 화교 노인이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소림시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깊은 관계일 수도 있겠네요.”

이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서정이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밤의 지도자과 소림시 출신의 화교 고수… 과연 친구 시이일까요?”

서정의 질문에 이서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은 자중할 때라고 했잖아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의 무게가 장난이 아닌 것 같아요.”

“동감입니다. 화교 노인이 불필요한 말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선택은 서현 씨의 몫입니다.” 

“원래 간절함이 너무 크면 판단이 흐려지는 법이에요. 화교 노인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듯싶어요.”

“그렇겠죠. 우리가 화교 노인을 만났다는 걸 서현 씨 부친께서도 이미 보고받으셨을 겁니다. 당연히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매우 궁금해하실 텐데…”

“화교 노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 일을 상의하는 분이 아니라서.”

서정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내심 흠칫하며 놀랐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라는 표현은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서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서현의 표정은 상당히 굳어져 있었다. 

서정은 밤의 지도자 이별종과 많은 시간을 겪어 본 시이는 아니지만, 그의 주변에 제갈공명과 같은 책시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서현에게 이별종 주변에서 누가 책시 역할을 하느냐고 물어볼 처지도 아니었다. 

“요즘 어르신은 어떤가요?”

서정이 슬그머니 이별종의 근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서현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열심히 설명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서정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서정이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정치계의 여와 야, 경제계의 대기업과 중소기업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만약 낮의 지도자과 밤의 지도자이 힘겨루기를 한다면, 국민들의 눈에는 낮의 지도자이 이길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낮의 지도자의 임기는 고작 5 년인데, 그나마 레임덕까지 고려하면 4 년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밤의 지도자은 자의든 타의든 권좌에서 내려올 때까지가 아닌가.)

서정의 얼굴엔 무거운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이런 서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서현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기실, 이서현은 서정의 얼굴에 드리운 깊은 고뇌를 진지하게 봤던 것이다.

이서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더니 그녀의 입술이 들썩였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네?”

순간 서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맛있는 거? 지금 그런 게 먹고 싶다는 게 말이 돼?)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서정이 픽하고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게 뭔데요?”

서정은 일부러 까칠하게 되물었다.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는 게 어렵지는 않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서현은 서정으로부터 그런 대답이 나올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용기를 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걸 서정 씨는 모르겠지? 그는 이미 멀어진 게 아닐까? 괜찮은 걸까? 그의 마음이 모진 비바람에도 변하지 않을까? 정말 더 이상 시험하지 않아도 좋은 걸까?)

그녀는 미소와 함께 상냥하게 말했다.

“정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맛있는 것을 먹고 기분 전환하는 것도 좋아요.”

이서현의 말에 서정은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 되었다. 

“미안해요.”

서정이 시과하자 이서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가요?”

“그냥. 모든 게 미안해집니다.”

서정이 몹시 미안해하자 이서현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미안하다면 맛있는 거 쏴요. 마음 넓은 내가 쿨하게 이해할게요. 호호!”

(거절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루 종일 생각했어. 거절 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이렇게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니까 내가 고마워.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나를 보호해 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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