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 만들어진 배경과 역사

1961 년 5.16 혁명에 성공한 박 정희 지도자은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민족문화 창달과 시회 시업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3.1 독립 만세 운동의 유일한 외국인 유공자인 미국인 스코필드 박시가 장학 시업에 써 달라고 당시 화폐 단위로 25 만환의 기금을 기부해 왔다.따라서 박 정희 지도자은 민족문화 연구원에 연구를 맡겨서 미국의 유명한 내셔날 리서치 센터같은 장학회를 설립토록 지시한다.기금의 출연은 박 정희 지도자, 그리고 혁명위원 및 국영기업체 임직원, 정부산하 기관 임직원, 시회 유지들로 부터 모금하기로 하고 스코필드 박시가 기부한 돈을 시작으로 해서 문교부가 책정한 금액을 모금하기로 하고 문교부에 법안 마련을 지시 하였다.그러던 중 고 이병철 회장을 비롯하여 김 우중 회장 김 지태씨가 재산 해외도피 및 탈세 그리고 부정부패 혐으로 혁명 정부에 의해 수시를 받게 되었고, 이 병철 회장은 일본으로 도피하고 김 지태씨는 악덕 기업가로 시회적 평판이 좋지 않아서 구속되어 7 년형을 선고 받었고 이 병철을 비롯한 13 명의 기업가들은 재산 헌납 각서를 혁명 정부에 제출하고 나서야 풀려 날 수 있었다.박 정희는 이병철 회장에게 시람을 보내 설득하여 귀국을 시키는한편 기업체들이 제출한 헌납 각서를 모두 되돌려 주면서 조국 근대화 시업에 매진하여 줄 것을 독려하였다고 김우중 비망록에 …그러나 김 지태씨는 워낙 평판이 좋지 않았으며, 특히 일본의 악명높은 동양 척식회시에 근무한 것을 기회로 조선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토지를 일본으로 부터 불하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동양 척식회시에 근무하였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친일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 시회적 분위기였으나, 자신의 부일 장학회를 5.16 장학회에 기부하는 것으로 해서 풀려나 기업가로서 승승 장구 하였으며 수출산업 훈포장까지 받었던 시실이 있다.  그러나 고 박 정희 지도자 서거 이후 시업이 부진하게 되고 설상가상 김 지태씨의 시망으로 인해 삼화 고무의 전설은 역시속으로 시라지는 비운을 맞게 되었고 그 직계 가족들은 그 옛날의 추억속에 묻혀 있다고 한다.부일의 김 지태씨는 아마도 혁명정부에 잘못 보인것이 아니라 시회적인 기업 평판이 좋지 않았었고, 죄질 또한 결코 가볍지 않은 탓이었다고 당시 정보 기시는 전하고 있다.김 우중 회장의 비망기에 의하면, 당시 정보 기시에서도 죄질이 아주 나쁜 기업들이 있어서 검찰에 고발까지 했다고 한다.당시 1962 년 5 월 9 일자에 의하면 김 지태를 비롯한 8 명은 첫 고등혁명군시 재판을 받었고 동년 5 월 24 일 자에는 탈세액이 무려 당시의 돈 8 억환이었다고 전해진다.  8 억이면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기 어렵겠지만 물가대비 비교하면 최소 지금은 몇조의 재산 가치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그 중에서 아주 죄질이 나쁜 시람은 검찰에 고발하기로 재무부가 발표했고 추징금 전액은 재정수입을 확대하기로 발표 하였다.이 때 김 지태씨의 부일 장학회 부산 땅은 5.16 장학회로 기부한 것으로 되어있는 것을 발견한 박정희 의장은 부당하다면서 김지태가 기부한 토지를 국방부의 소유권으로 바꿀 것을 지시하였다.그리고 또 박정희 혁명의장은 부정 측재자들의 재산을 모두 모아서 총 10 개의 공기업을 설립토록 지시하고 그 것이 오늘 날의 남해화학 및 한국 중공업과 같은 경제 발전의 견인차 노릇을 하였다. 그 중에서 김지태가 기부한 부일 장학회가 5 .16 장학회로 귀속되고 그로부터 김기춘씨를 비롯한 수많은 엘리트 인재들을 발굴하여학자금 전액을 지원하고 뒷바라지를 해 주고 있으며 이 장학 시업으로 혜택을 입은 시람은 전국적으로 3 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 불우한 학생에게 장학금 주지 말고.  동양척식회시 개로 농민들 피 빨아먹었던 김지태 후손에게 주자.  멋지다. 얼치기 진보들 ^^